한국 픽업트럭의 부활과 기아의 반란… “형님 현대차 제쳤다”
한국 자동차 시장의 지형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좁은 도로와 주차 난, 그리고 ‘짐차’라는 편견 탓에 외면받던 픽업트럭 시장이 6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동시에 만년 2위로 여겨지던 기아가 미국 시장에서 형님 격인 현대차를 제치는 파란을 일으키며 글로벌 무대에서의 위상을 다시 쓰고 있다.
가성비와 실용성으로 무장한 한국형 픽업트럭의 공습
그동안 국내 픽업트럭 시장은 수입차의 독무대거나, 아주 제한적인 수요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다. 카이즈유데이터 연구소 자료를 보면 올 1월부터 8월까지 픽업트럭 판매량은 1만 7136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75%나 급증했다. 이미 작년 한 해 전체 판매량을 넘어선 수치다.
이러한 반등의 중심에는 ‘가성비’를 앞세운 국산 신차들이 있다. 지난 2월 기아가 출시한 ‘타스만’과 3월 KG모빌리티가 내놓은 전기 픽업 ‘무쏘 EV’가 그 주역이다. 두 모델 모두 실구매가가 3천만 원대부터 시작해, 6천만 원을 호가하는 수입 픽업트럭 대비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여기에 국내 소비자 입맛에 맞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편리한 AS망까지 더해지니 수입차 구매를 망설이던 대기 수요가 대거 흡수된 것이다.
특히 무쏘 EV는 경제성을 중시하는 개인 사업자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혜택 등을 더하면 3천만 원 초반대에도 구매가 가능한 데다, 1회 충전 시 400km를 달릴 수 있어 기존 1톤 전기 트럭의 훌륭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구매자의 60% 이상이 개인 사업자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레저 문화의 확산과 인식의 변화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도 시장 확대에 한몫했다. 차박과 캠핑이 보편화되면서 적재 공간이 넉넉한 픽업트럭이 레저용 차량(RV)의 새로운 강자로 재조명받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타스만 구매자의 약 70%가 50대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여유를 찾은 장년층이 자신의 취향과 레저 활동을 위해 과감하게 지갑을 열고 있는 셈이다. 최근 테슬라 사이버트럭을 타는 지드래곤과 같은 유명인들의 모습이 노출되며 픽업트럭을 트렌디한 차종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늘어났다.
이러한 내수 시장의 성공은 해외 진출의 발판이 되고 있다. 기아는 이미 타스만을 호주와 중동 등 픽업트럭 수요가 높은 지역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남미 시장 진출도 계획 중이다. KG모빌리티 역시 유럽의 딜러망을 활용해 전기 픽업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미국서 현대차 제친 기아, SUV 명가로 우뚝
국내에서 픽업트럭으로 재미를 본 기아의 상승세는 미국 시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1월, 기아는 미국 시장 진출 이후 처음으로 월간 판매량에서 현대차를 앞지르는 기염을 토했다. 기아는 6만 4502대를 판매해, 제네시스를 포함한 현대차의 6만 794대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
이러한 역전극의 일등 공신은 단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다. 미국에서는 SUV와 픽업트럭을 합쳐 ‘라이트 트럭’으로 분류하는데, 이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곧 전체 실적을 좌우한다. 기아의 스포티지는 전년 대비 23%나 판매량이 늘며 현대차 투싼을 턱밑까지 추격했고, 대형 SUV 텔루라이드는 현대차 팰리세이드를 제치고 해당 세그먼트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삼성증권 임은영 연구원은 “2월부터 텔루라이드 2세대 모델 판매가 본격화되면 기아의 점유율은 더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단 라인업에서도 기아 K4가 선전하며 그룹 내 모델별 판매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시장의 지각변동, “세단은 현대, SUV는 기아”
물론 국내 시장 전체를 놓고 보면 여전히 현대차의 벽은 높다. 아반떼, 소나타, 그랜저로 이어지는 탄탄한 세단 라인업 덕분에 작년 기준 현대차는 기아보다 16만 대 이상 더 많은 차를 팔았다.
그러나 시장의 판도가 SUV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두 브랜드 간의 경쟁 양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국내 신차 판매 중 SUV 비중은 매년 꾸준히 상승해 2025년에는 51.1%를 기록, 처음으로 과반을 넘어섰다.
이러한 흐름은 SUV 라인업이 강한 기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소형부터 중형에 이르기까지 SUV 부문에서는 기아가 현대차를 압도하는 모양새다. 특히 작년 국내 베스트셀링카에 등극한 쏘렌토는 10만 대 넘게 팔리며, 경쟁 모델인 싼타페(5만 7천여 대)를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로 따돌렸다. 픽업트럭이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장착한 기아와 전통의 강자 현대차의 집안싸움은 앞으로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